[34호]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내 남편은 영원한 나의 동지
현진희 전여농 제주도연합 정책위원장
전여농 사무국장으로부터 예전에 내가 “내 남편은 영원한 나의 동지”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있어 농민의 길에 양성평등 관련 원고를 실으려고 한다는 전화가 왔다. 내가 그런 글도 쓴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무국장이 이메일로 보낸 글을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2년 전(2005년)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다시 한 번 남편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움을 느낀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제주도여농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요즘은 제주도 여성농업인육성지원조례와 대정여성농민한마당 때문에 거의 집에 있지 못한다. 밭일이 끝나자마자 목욕만 하고 집을 나선다.
여전히 저녁준비와 아이들 챙기기는 남편의 몫. 처음에는 묵묵히 있더니만 조금씩 짜증이 나는 모양이다. 그 짜증에 일일이 대응하면 내 활동의 폭이 줄어들어야 할 상황. 남편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여전히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인 것 같다.
동네 계모임 아줌마들이랑 하루 종일 제주시내 쇼핑을 하고 저녁 늦게까지 술 한 잔하고 집에 들어오니 집안이 번듯하게 먼지 없이 정리되어 있다. 전기밭통을 보니 압력솥에 밥을 하고 담아 놓았다. 내일부터 반세계화 투쟁을 하러 홍콩으로 떠날려니 근 열흘 혼자 일할 아내가 애처로와 집안일을 해 놓은 것이다. 아줌아들이랑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터라 시내 쇼핑을 하러 간다고 하니 내일부터 혼자 브러콜리를 따면 힘드니 쇼핑가지 말고 일하자고 하는 걸 1년에 한번 있는 모임을 가야한다고 얼굴 붉히며 나왔다. 홍콩투쟁 떠나기 전까지 싸움이라니.
우리 부부는 유달리 다른 부부에 비해 싸움이 잦은 편이었다. 결혼한 지 지금은 만 9년이 조금 넘었지만 결혼 7년차까지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싸우는 편이었다.
밭일을 하는데 서로의 의견차가 나서도 싸우고, 집회를 가야하는데 한 사람은 집일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 생겨도 서로 집회를 갈려고 싸웠다. 지금은 많이 정리가 되었지만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조금은 언성이 오가곤 하는 편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남편보고 공처가라고 놀린다. 그것도 아내에게 꼼작 못하는 공처가.
이런 소리를 들은 만도 한 것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애기 엄마하고 의논하고 결정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호기 있게 말을 하지 못하니 주변 사람들이 놀리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 많이 속이 상한다. 하지만 남편은 이런 소리를 한귀로 흘려버린다. 우리 부부만 좋으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
누가 밭을 임대해서 농사지어 보지 않겠냐고 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혼자 결정하고 와서 아내에게 통보를 하는 편이지만 우리 남편은 반드시 의논을 하고 같이 결정한다. 혼자 결정하는 것에 순순히 따라가는 나도 아니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항상 같이 의논한다.
활동의 지위나 활동방향을 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2003년 2004년은 제주도여농 사무처장을 맡았다. 상대적으로 남편은 부담이 덜한 역할을 맡았는데 올해는 남편이 도연맹 협개위원장을 맡으면서 협동조합개혁투쟁에 열심히 하고 싶었고 매달마다 있는 전국회의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내게 올해는 자기의 활동을 보장해주라고 하면서 요구를 하였다. 하지만 도여농 정책실장을 맡게 되었는데 도여농 활동만으로는 큰 부담이 없었는데 올해는 2차 5개년 여성농업인육성법이 다시 만들어지는 해여서 전여농에서 1차를 분석하고 2차 전여농 안을 만들어야 하는 중요한 해였기에 비행기를 타는 회의가 다른 해 보다 많게 되었다.
남편은 제안을 해왔다. 본인이 한 달에 한번 육지회의 가야하니 나보고는 집안에 재정적인 부담이 크니 안가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내가 사무처장 시절에 남편이 워낙 배려를 잘해줘서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물론 나도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전여농 상황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라도 가서 의견을 조금이라도 보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다. 며칠간 이 문제를 가지고 언쟁이 오고 갔다. 결국 남편이 내 놓은 안은 두 달에 한번 씩 돌아가면서 육지 회의를 가자는 것이었다.
이번 달 내가 가면 다음 달은 남편이 가는 것이었다. 조직적인 상황에서 이 결정은 올바른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 집안 가정경제상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마음속으로 남편에게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한 미안한 마음은 아직까지도 있다.
그래서 홍콩 투쟁하러 가는 것을 양보했는지도 모른다. 이치상으로는 제주도여농 희망실천단 집행위원장이기도 하고 작년에 남북농민통일대회에 남편이 갔었기 때문에 내가 이번에는 반세계화 투쟁하러 갈려고 했는데 하우스 깻잎 농사 때문이기도 하고 이러저러 해서 가지 못했는데 남편은 굉장히 미안해하였다.
올해 아리랑 축전에 전세기에 사람이 부족해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갈 기회가 되어 가라고 남편이 몇 번이나 얘기를 했지만 한명은 홍콩가고 한명은 아리랑 축전가면은 경제적으로 감당이 될 것 같지 않아 내가 양보를 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내년에 있는 남북농민통일대회는 나보고 반드시 가라고 홍콩 갔다 오자마자 성화다. 이처럼 남편은 모든 일에 있어 배려하고 의논하고 같이 하려고 한다.
집안일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시집오자마자 우리는 가사를 거의 50대 50으로 하는 편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밥을 차리면 설거지는 남편이 하고 내가 빨래를 하면 개는 것은 남편이 하고 내가 비질을 하면 걸레질을 남편이 한다. 한쪽이 가사노동을 한때 한쪽이 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애가 셋이지만 애들 목욕을 내가 한번적은 거의 없다. 남편이 애들 목욕은 전담이다. 초등학교 2학년이 큰딸이지만 지금도 애 아빠가 다 하는 편이다. 남편은 딸 다섯에 아들에 하나인 집에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시집 분위가가 아들, 아들 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부엌일을 아주 잘 도와주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시어머니 댁과 바로 붙어 있다. 그래서 시어머니 댁에서 밥을 자주 먹는 편인데 처음 시집왔을 때 어머니 댁에서 밥을 먹고 남편이 설거지 하는 것을 시어머니, 시누이가 보고서는 한소리 하셨다.
둘이 있는 때는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는데 시어머니나 시아버지 앞에서는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남편은 그렇지 않다고. 우리 집에서는 하고 어머니 집에서는 하지 말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면서 아랑곳 하지 않고 하니 어디서는 어떤 집안일을 하던 이제는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남편도 집안일을 하지 않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로 우리 친정이다. 친정에만 가면 밥상한번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집에서 맨날 하는 일 친정 와서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도 내버린다. 일 년에 잘해봐야 다섯 번 내 생활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으니 말이다.
이처럼 남편이 집안일을 잘 도와주는 이면에는 그만큼 나도 농사일에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다. 남편은 쉽게 인부를 구해서 일을 하자고 하면 조금이라도 인건비를 아끼려고 남편과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사람을 빌려서 잘하지 않으려고 한다.
제주도는 워낙 사람구하기가 힘들어 지금은 인력업체를 빌리지 않고 사람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제 옆집에 감자를 캐는데 여자 한사람을 빌면 42000원이 든다고 한다. 이러니 농사물도 워낙 싼데다가 농약, 비료 모든 것이 올라 인건비마저 많이 올라 이 적자 농사를 조금이라도 만회를 하려면 우리 몸이 망가지지 않고는 그나마 지탱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그러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투쟁이 없는 날을 제외하고는 일을 하지 않는 날이 없다. 제주도는 날씨가 따뜻해 일 년 내내 농사를 해야 하는 구조니 남들 하는데 안할 수도 없고 농한기가 없이 일하니 너무나 힘들다. 옆집 친구는 감자가 똥값에 어제께 판 감자 값을 계산하니 겨우 어제 인건비와 박스 값을 제하면 남는 것이 없다.
밭 임대료, 농약, 비료, 심을 때 인건비, 종자값, 기계값 제 인건비는 고사하고 이것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야 할 판이다. 이런 농사를 계속지어야 할 것인가. 그렇다고 딴 일을 하자니 할 것이 없고 가슴만 답답하고 만다.
며칠 전에 도연맹 의장을 하셨던 분이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하셨다. 자살을 하던 날 당일 집안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 분도 빚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 같다. 대학교 3학년, 내년에 1학년, 고등학교 2학년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조문을 같은데 사모님이 하염없이 눈물은 흘리셨다. 저 모든 것이 우리 아픈 농촌의 현실이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올해는 왜 이렇게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내 36살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많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강기갑의원이 한 달 넘게 단식하면서 인터뷰하는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울고 쌀 국회비준이 통과되어 울고 친구 신랑이 죽어서 울고 우리 투쟁의 목소리가 주변의 농민들이 잘 몰라주어서 울고 왜 이렇게 농민들의 투쟁은 매번 승리하는 투쟁이 되지 못하는 가에 대해 울고 올해 우리의 수많은 농민동지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당해서 울고 이제는 정리가 되는구나 하는 순간에 우리 도연맹 전의장님이 돌아가시고 왜 이런 절망스런 상황이 반복되는지 울분이 솟구친다.
나는 내 생애 있어 2005년은 머릿속에 지워버리고 싶은 해이지만 더욱 더 또렷하게 기억할 것이다. 우리 동지들을 죽음으로 내 몬 사람들이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 더욱 더 투쟁을 해야 할 것이기에 대해 다시 한 번 각인시킨 분들을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동지들을 다시 한 번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욱 더 애정을 갖고 대할 것이다.
admi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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